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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개 치키티토
필리퍼 피어스 글(1962) 햇살과나무꾼 옮김(1999) 시공주니어
친구가 필요한 아이
벤은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싶어하는 남자아이다. 식구들은 많고 집은 비좁으며 벤이 사는 도시 런던 또한 복잡하기 짝이 없다. 이 모든 것을 알기에 '우리 집에서 개를 키울 수는 없다'고 하는 엄마를 이해하면서도 벤은 개를 키우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식구는 많지만 누나 둘, 남동생 둘 사이에서 외톨박이로 남아있는 벤. 그에게 '개를 가지고 싶다'는 건 단순히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친구를 가지고 싶다는 바램이다.
생일날 개를 선물로 주겠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철썩 같이 믿던 벤 앞에 도착한 것은 개 한 마리를 수놓은 그림뿐이다. 낙심한 벤은 어느 날부터인가 눈을 감으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개와 만나게 된다. 그림 속의 개 이름을 따서 '치키티토'라고 부르며 벤은 점점 그 개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공상도 지나치면 병이 되는 법. 점차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이나 자신의 일을 귀찮아하며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벤을 다들 이상하게 생각한다. 급기야는 길 한복판에서 눈을 감고 머리 속에 떠 오른 개를 쫓아가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현실 세계보다 머리 속에 펼쳐지는 자기만의 세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어버린 벤의 모습에서 요새 늘어간다는 사이버 중독증 환자가 떠올랐다고 하면 우스울까?
벤의 집은 옆에 넓은 공원이 있는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벤은 할아버지 댁에 새로 태어난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와 키울 수 있게 된다. 꿈에 부풀어 강아지를 데리러 간 벤 앞에 나타난 것은 벤이 머리 속에 몇 날 며칠이나 그리고 또 그리던 '치키티토'-너무 작아서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개-가 아닌, 덩치 커다란 개 한 마리. 실망한 아이는 개를 쫓아버리려 한다.
하지만 누군가와-설령 그것이 개라 할지라도- 친구가 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자기가 만들어 낸 '이상형'만을 제일로 여기고 그것과 꼭 맞는 상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면 도대체 누구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 후에 둘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벤이 브라운(새로 키우게 된 개)을 다시 소리쳐 부르는 마지막 장면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한 뼘 더 마음의 키가 자란 벤이 전부 다는 아니겠지만 외로움을 조금쯤 덜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서.
식구들의 수더분한 사는 얘기
벤의 이야기와 더불어 식구들 얘기가 퍽이나 재미있었다. 영국을 배경으로 한 글이지만 별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비슷하다고 할까?
자식들을 사랑하지만 힘겨워하기도 하는 아빠, 두 딸을 품안에서 떠나보내고 마음이 허전해 하는 엄마, 결혼을 앞두고 온통 신경이 거기에만 쏠려있는 메이, 이제 집을 떠나 독립하고 싶어하는 딜리스, 개구쟁이 폴과 프랭키의 모습은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인 듯 자연스러워 보인다.
또 조금은 어눌한 할아버지와 몸이 자유스럽지 못한 지금까지도 깔끔하게 집안 살림을 하고 싶어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보는 사람들 모습 그대로이다.
마음 속에 남는 한 마디
아무리 간절하게 소망한다 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은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을 갖지 않으면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228쪽)
애타게 바라는 건 이루어지게 마련이에요. 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것에 만족하며 사는 법을 또 배워야죠. (222쪽)
뭔가 서로 어긋나는 저 두 가지 얘기. 하지만 곰곰이 새겨보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느껴진다. '최선책'(올바른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이나 '1등'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 '차선책'이나 '2등' 또한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는 거.
학교 다닐 때 많이 듣던 말 중에 "하면 된다"는 말이 있다. 정말 그런 줄 알았다. 뭐든지 내가 열심히 하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이루어지지 않는 일 앞에 서면 내 노력이 부족한 거라고, 다시 한 번 해 보면 될 거라고 위안하던 때가 있다.
그러나 사는 게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 커 가면서 해 봐도 안 되는 게 있더라는 걸 하나씩 깨달아가면서 느꼈던 그 씁쓸한 기분이란.
어느 쪽이 더 옳은 것일까. 그래도 아이들에게만은 "하면 된다"고 꿈(!)을 심어주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너의 간절함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어야 하는 것일까.
2001/11/27
어도연 외국동화분과 발제>
* 표지 출처: yes24
필리퍼 피어스 글(1962) 햇살과나무꾼 옮김(1999) 시공주니어
친구가 필요한 아이
벤은 개를 한 마리 키우고 싶어하는 남자아이다. 식구들은 많고 집은 비좁으며 벤이 사는 도시 런던 또한 복잡하기 짝이 없다. 이 모든 것을 알기에 '우리 집에서 개를 키울 수는 없다'고 하는 엄마를 이해하면서도 벤은 개를 키우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식구는 많지만 누나 둘, 남동생 둘 사이에서 외톨박이로 남아있는 벤. 그에게 '개를 가지고 싶다'는 건 단순히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친구를 가지고 싶다는 바램이다.
생일날 개를 선물로 주겠다는 할아버지의 말을 철썩 같이 믿던 벤 앞에 도착한 것은 개 한 마리를 수놓은 그림뿐이다. 낙심한 벤은 어느 날부터인가 눈을 감으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개와 만나게 된다. 그림 속의 개 이름을 따서 '치키티토'라고 부르며 벤은 점점 그 개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공상도 지나치면 병이 되는 법. 점차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이나 자신의 일을 귀찮아하며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벤을 다들 이상하게 생각한다. 급기야는 길 한복판에서 눈을 감고 머리 속에 떠 오른 개를 쫓아가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현실 세계보다 머리 속에 펼쳐지는 자기만의 세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어버린 벤의 모습에서 요새 늘어간다는 사이버 중독증 환자가 떠올랐다고 하면 우스울까?
벤의 집은 옆에 넓은 공원이 있는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벤은 할아버지 댁에 새로 태어난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와 키울 수 있게 된다. 꿈에 부풀어 강아지를 데리러 간 벤 앞에 나타난 것은 벤이 머리 속에 몇 날 며칠이나 그리고 또 그리던 '치키티토'-너무 작아서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개-가 아닌, 덩치 커다란 개 한 마리. 실망한 아이는 개를 쫓아버리려 한다.
하지만 누군가와-설령 그것이 개라 할지라도- 친구가 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자기가 만들어 낸 '이상형'만을 제일로 여기고 그것과 꼭 맞는 상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린다면 도대체 누구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 후에 둘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니던가.
벤이 브라운(새로 키우게 된 개)을 다시 소리쳐 부르는 마지막 장면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한 뼘 더 마음의 키가 자란 벤이 전부 다는 아니겠지만 외로움을 조금쯤 덜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서.
식구들의 수더분한 사는 얘기
벤의 이야기와 더불어 식구들 얘기가 퍽이나 재미있었다. 영국을 배경으로 한 글이지만 별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비슷하다고 할까?
자식들을 사랑하지만 힘겨워하기도 하는 아빠, 두 딸을 품안에서 떠나보내고 마음이 허전해 하는 엄마, 결혼을 앞두고 온통 신경이 거기에만 쏠려있는 메이, 이제 집을 떠나 독립하고 싶어하는 딜리스, 개구쟁이 폴과 프랭키의 모습은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인 듯 자연스러워 보인다.
또 조금은 어눌한 할아버지와 몸이 자유스럽지 못한 지금까지도 깔끔하게 집안 살림을 하고 싶어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서도 자주 보는 사람들 모습 그대로이다.
마음 속에 남는 한 마디
아무리 간절하게 소망한다 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은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것을 갖지 않으면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228쪽)
애타게 바라는 건 이루어지게 마련이에요. 하지만 그 다음에는 그것에 만족하며 사는 법을 또 배워야죠. (222쪽)
뭔가 서로 어긋나는 저 두 가지 얘기. 하지만 곰곰이 새겨보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느껴진다. '최선책'(올바른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이나 '1등'만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 '차선책'이나 '2등' 또한 그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는 거.
학교 다닐 때 많이 듣던 말 중에 "하면 된다"는 말이 있다. 정말 그런 줄 알았다. 뭐든지 내가 열심히 하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이루어지지 않는 일 앞에 서면 내 노력이 부족한 거라고, 다시 한 번 해 보면 될 거라고 위안하던 때가 있다.
그러나 사는 게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 커 가면서 해 봐도 안 되는 게 있더라는 걸 하나씩 깨달아가면서 느꼈던 그 씁쓸한 기분이란.
어느 쪽이 더 옳은 것일까. 그래도 아이들에게만은 "하면 된다"고 꿈(!)을 심어주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너의 간절함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어야 하는 것일까.
2001/11/27
어도연 외국동화분과 발제>
* 표지 출처: yes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