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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적의 딸 로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1981) 김라합 옮김(1992) 일과놀이
몇 달에 걸쳐 분과 사람들과 함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책을 읽어나갔다. 린드그렌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유독 내 마음을 끌었던 책은 《산적의 딸 로냐》였다. 이 책 속에는 '로냐'라는 매력적인 아이와 끝날 때까지 눈을 뗄 수 없는 이야기와 많은 생각거리들이 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른 이런저런 생각들을 옮겨본다.
로냐라는 아이
로냐는 내가 어렸을 때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의 주인공들- 초록지붕 집에 사는 앤이나 소설가의 꿈을 꾸는 죠우-이나 린드그렌의 유명한 주인공 '삐삐'와는 또다른 매력을 지닌 아이다. 아이다움과 어른스러움, 활달함과 침착함을 함께 지닌 아이. 이것은 로냐만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어른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사춘기 아이들의 숨은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로냐가 자리하고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사뭇 다르지만, 그 아이의 모습은 거짓으로 느껴지지도, 너무나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수리 마녀가 날아다니고 회색 난쟁이가 불쑥 튀어나오는 배경을 빼고 사람만 보면 옆집 아이처럼 친숙하게 느껴진다.
린드그렌이 책 속에 그려낸 아이들을 보노라면 '정말 아이답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이렇게 아이들 속을 잘 알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로냐 또한 그렇다. 친구를 사귀기 전까지는 마티스의 성이나 숲 속에서도 혼자서 즐겁게 지낼 수 있었지만, 비르크와 만난 뒤에 그리움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다.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친구 비르크와 사소한 것 때문에 다투고 속상해 하고, 그리고는 곧 후회하고 다시 친해진다. 언제나 올바르다고 믿던 부모의 다른 모습을 알고나서는 반항하고 집을 나오지만 바깥에서는 집을 그리워하고 눈물짓는 아이다. 우리가 언제나 아이들에게서 보는 그 모습을 로냐에게서도 본다.
밝고 씩씩하고 생각할 줄 아는 아이 로냐가 나는 정말 좋다.
여자와 남자
로냐의 아빠 마티스와 그를 따르는 열두 명의 남자들은 다른 어떤 무리보다도 '남자답다'는 말이 어울릴 '산적'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던 산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힘으로 보르카 무리를 이기고 싶어하고 큰소리 치기 일쑤인 마티스지만 자기 감정을 밖으로 나타내는데 인색하지 않고 (이렇게 툭 하면 흥분하고 여러 번 눈물 흘리는 아빠는 책 속에 자주 나오지 않는다) 딸아이의 일에 대해서는 잔걱정도 많고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그에 비해 엄마 로비스는 다정하고 꼼꼼하지만 큰 일이 닥쳤을 때는 침착하고 담이 크다. 로냐에 대해서도 마티스보다 한 발짝 더 뒤에 물러서서 지켜볼 줄 아는 엄마다.
슬픔에 겨워 울부짖는 마티스, 시끄러운 산적들에게는 고함을 치지만 슬퍼하는 마티스를 안아서 달래주는 씩씩한 로비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여자가…' 또는 '남자가…'라는 덫은 우리네 삶 여기저기에 놓여있다. 그런 생각에 대한 통쾌한 한 방이었달까. 이런 모습이 그려져도 어색하지 않은 건, 또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던 건 린드그렌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여자들의 자리가 높은 스웨덴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자식과 부모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한다. 마티스와 보르카는 숲을 호령하는 무지막지한 산적이지만 자식 일에는 한없이 마음 약해지고,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자식을 보고 심란해 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별다를 바 없다.
그러나 로냐가 자라서 처음으로 숲에 나갈 때 마티스와 로비스가 어떤 말을 하면서 보내는지, 마티스에게 반발해서 집을 나간 로냐를 로비스가 어떻게 기다려 주는지, 이런 것들을 보면서 올바른 부모의 자세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이제 집을 떠나 더 넓은 세계로 가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자신의 틀에만 가둬놓지 않고 지켜 봐줄 줄 아는 부모가 그들이기 때문이다.
"수리 마녀들과 회색 난장이, 그리고 보르카네 산적들을 조심해라."
"어떻게 생긴 게 수리 마녀고 회색 난장이인지, 누가 보르카네 산적인지 어떻게 알 수 있죠?"
"너는 이미 그걸 알고 있다."
"숲에서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하죠?"
"곧게 난 오솔길을 찾도록 해라."
"강물에 빠지면 어떻게 하죠?"
"헤엄을 쳐라."
"…또 조심해야 할 일이 있나요?"
"다 됐다. 이제 차차 하나씩 하나씩 터득하게 될 게다. 자, 가거라!" (1권 22-24쪽에서 부분 발췌)
… 굴 앞의 넙적 바위에서는 로비스가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 딸 로냐야, 머리가 젖었구나! 헤엄쳤니?"
로비스가 물었습니다.
(중략)
로냐는 엄마 곁에 앉아, 엄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습니다. 산이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들릴락 말락 조용히 흐느꼈습니다.
"내가 왜 왔는지 알지?"
로비스가 이렇게 말하자 로냐는 흐느끼며 웅얼거렸습니다.
(중략)
"엄마, 만일 엄마가 저라면, 그리고 엄마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을 정도로 무정한 아빠를 가졌다면, 그런 아빠에게 돌아가겠어요? 아빠가 찾아오거나 집으로 돌아오라고 사정을 하지 않아도요?"
로비스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니, 나 같으면 돌아가지 않을 게다. 아빠가 나에게 사정을 해야지, 암, 그래야지!"
(중략)
환한 아침이 되어서야 로냐는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때 이미 로비스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로비스가 놓고 간 회색 스카프만 덩그마니 놓여 있었습니다. 로비스는 로냐가 잠든 사이에 그걸로 로냐를 덮어 주었던 것입니다. (2권 89-95쪽에서 부분 발췌)
마티스는 숲으로 간 로냐가 마주치게 될 위험을 조목조목 짚어주지만 결코 앞서 나가거나 부모가 다 해결해 주려 하지는 않는다. 로비스 또한 집을 나간 로냐를 섣불리 달래려 들거나 억지로 집으로 데려오지 않는다. 얘기를 들어주고 잠자는 사이에 덮어준 스카프로 딸에 대한 사랑을 말없이 전해줄 뿐이다.
나라면 이들처럼 너 혼자 바깥 세상에 나가서 겪어보고 깨닫거라 하면서 열두 살 아이를 쉽게 세상에 내보낼 수 있을까. 로냐가 살던 때나 지금이나 바깥 세상은 언제나 위험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데도 말이다. 어렵지만 용기를 내는 일도 부모가 할 일이다.
그리고…
책 속에서 그려지는 숲 속의 모습은 손에 잡힐 듯 하다. 나란 사람은 등산과는 거리가 멀기에 '숲'이란 말을 들으면 고작해야 동네 뒷산이나 수목원 속의 모습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로냐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숲과 강과 그 속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머리 속에서만 만들면 절대 이런 표현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 린드그렌 그 자신이 직접 겪어보고 쓴 글일 거라는 믿음이 든다.
줄거리만 꿰뚫고 나면 더 이상 볼 게 없는 책 말고 여러 갈래로 생각해 볼 것이 많은 책이 좋은 책이라 했던가. 《산적의 딸 로냐》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내게 '좋은 책'으로 남을 것이다. 로냐가 되어서, 로비스와 마티스가 되어서, 비르크가 되어서, 때로는 산적 떼가 되어서 그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읽어보려 한다.
2002/03/04
어도연 회보 '책 이야기'>
어도연에 다니면서 책을 읽기 시작한 지 만 2년 되었을 때 쓴 글.
난 그때만 해도 글을 쓰면 '제목'을 붙여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산적의 딸 로냐>를 읽고' 이렇게 떠억 써서 원고를 보냈다.
편집부에서 전화가 와서 제목을 정해달라고 하는데 어찌나 난감하던지...
결국 내가 붙이질 못하고 "알아서 좀 붙여 주세요." 이런 비겁한 발언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이 얼마나 황당하고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으셨을까.
(이 글을 보실 일은 없겠지만, ㄱ선생님, 죄송해요... ^^;;)
그래서 이 글에는 따로 제목이 있긴 하지만
여기에는 적지 않는다.
* 표지 출처: yes24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1981) 김라합 옮김(1992) 일과놀이
몇 달에 걸쳐 분과 사람들과 함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책을 읽어나갔다. 린드그렌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유독 내 마음을 끌었던 책은 《산적의 딸 로냐》였다. 이 책 속에는 '로냐'라는 매력적인 아이와 끝날 때까지 눈을 뗄 수 없는 이야기와 많은 생각거리들이 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른 이런저런 생각들을 옮겨본다.
로냐라는 아이
로냐는 내가 어렸을 때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의 주인공들- 초록지붕 집에 사는 앤이나 소설가의 꿈을 꾸는 죠우-이나 린드그렌의 유명한 주인공 '삐삐'와는 또다른 매력을 지닌 아이다. 아이다움과 어른스러움, 활달함과 침착함을 함께 지닌 아이. 이것은 로냐만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어른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사춘기 아이들의 숨은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로냐가 자리하고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사뭇 다르지만, 그 아이의 모습은 거짓으로 느껴지지도, 너무나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수리 마녀가 날아다니고 회색 난쟁이가 불쑥 튀어나오는 배경을 빼고 사람만 보면 옆집 아이처럼 친숙하게 느껴진다.
린드그렌이 책 속에 그려낸 아이들을 보노라면 '정말 아이답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이렇게 아이들 속을 잘 알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로냐 또한 그렇다. 친구를 사귀기 전까지는 마티스의 성이나 숲 속에서도 혼자서 즐겁게 지낼 수 있었지만, 비르크와 만난 뒤에 그리움과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다.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친구 비르크와 사소한 것 때문에 다투고 속상해 하고, 그리고는 곧 후회하고 다시 친해진다. 언제나 올바르다고 믿던 부모의 다른 모습을 알고나서는 반항하고 집을 나오지만 바깥에서는 집을 그리워하고 눈물짓는 아이다. 우리가 언제나 아이들에게서 보는 그 모습을 로냐에게서도 본다.
밝고 씩씩하고 생각할 줄 아는 아이 로냐가 나는 정말 좋다.
여자와 남자
로냐의 아빠 마티스와 그를 따르는 열두 명의 남자들은 다른 어떤 무리보다도 '남자답다'는 말이 어울릴 '산적'이지만 우리가 생각하던 산적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힘으로 보르카 무리를 이기고 싶어하고 큰소리 치기 일쑤인 마티스지만 자기 감정을 밖으로 나타내는데 인색하지 않고 (이렇게 툭 하면 흥분하고 여러 번 눈물 흘리는 아빠는 책 속에 자주 나오지 않는다) 딸아이의 일에 대해서는 잔걱정도 많고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그에 비해 엄마 로비스는 다정하고 꼼꼼하지만 큰 일이 닥쳤을 때는 침착하고 담이 크다. 로냐에 대해서도 마티스보다 한 발짝 더 뒤에 물러서서 지켜볼 줄 아는 엄마다.
슬픔에 겨워 울부짖는 마티스, 시끄러운 산적들에게는 고함을 치지만 슬퍼하는 마티스를 안아서 달래주는 씩씩한 로비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여자가…' 또는 '남자가…'라는 덫은 우리네 삶 여기저기에 놓여있다. 그런 생각에 대한 통쾌한 한 방이었달까. 이런 모습이 그려져도 어색하지 않은 건, 또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던 건 린드그렌이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여자들의 자리가 높은 스웨덴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자식과 부모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한다. 마티스와 보르카는 숲을 호령하는 무지막지한 산적이지만 자식 일에는 한없이 마음 약해지고,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자식을 보고 심란해 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별다를 바 없다.
그러나 로냐가 자라서 처음으로 숲에 나갈 때 마티스와 로비스가 어떤 말을 하면서 보내는지, 마티스에게 반발해서 집을 나간 로냐를 로비스가 어떻게 기다려 주는지, 이런 것들을 보면서 올바른 부모의 자세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이제 집을 떠나 더 넓은 세계로 가고 싶어하는 아이들을 자신의 틀에만 가둬놓지 않고 지켜 봐줄 줄 아는 부모가 그들이기 때문이다.
"수리 마녀들과 회색 난장이, 그리고 보르카네 산적들을 조심해라."
"어떻게 생긴 게 수리 마녀고 회색 난장이인지, 누가 보르카네 산적인지 어떻게 알 수 있죠?"
"너는 이미 그걸 알고 있다."
"숲에서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하죠?"
"곧게 난 오솔길을 찾도록 해라."
"강물에 빠지면 어떻게 하죠?"
"헤엄을 쳐라."
"…또 조심해야 할 일이 있나요?"
"다 됐다. 이제 차차 하나씩 하나씩 터득하게 될 게다. 자, 가거라!" (1권 22-24쪽에서 부분 발췌)
… 굴 앞의 넙적 바위에서는 로비스가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 딸 로냐야, 머리가 젖었구나! 헤엄쳤니?"
로비스가 물었습니다.
(중략)
로냐는 엄마 곁에 앉아, 엄마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었습니다. 산이 떠나갈 정도로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습니다. 들릴락 말락 조용히 흐느꼈습니다.
"내가 왜 왔는지 알지?"
로비스가 이렇게 말하자 로냐는 흐느끼며 웅얼거렸습니다.
(중략)
"엄마, 만일 엄마가 저라면, 그리고 엄마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을 정도로 무정한 아빠를 가졌다면, 그런 아빠에게 돌아가겠어요? 아빠가 찾아오거나 집으로 돌아오라고 사정을 하지 않아도요?"
로비스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니, 나 같으면 돌아가지 않을 게다. 아빠가 나에게 사정을 해야지, 암, 그래야지!"
(중략)
환한 아침이 되어서야 로냐는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때 이미 로비스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로비스가 놓고 간 회색 스카프만 덩그마니 놓여 있었습니다. 로비스는 로냐가 잠든 사이에 그걸로 로냐를 덮어 주었던 것입니다. (2권 89-95쪽에서 부분 발췌)
마티스는 숲으로 간 로냐가 마주치게 될 위험을 조목조목 짚어주지만 결코 앞서 나가거나 부모가 다 해결해 주려 하지는 않는다. 로비스 또한 집을 나간 로냐를 섣불리 달래려 들거나 억지로 집으로 데려오지 않는다. 얘기를 들어주고 잠자는 사이에 덮어준 스카프로 딸에 대한 사랑을 말없이 전해줄 뿐이다.
나라면 이들처럼 너 혼자 바깥 세상에 나가서 겪어보고 깨닫거라 하면서 열두 살 아이를 쉽게 세상에 내보낼 수 있을까. 로냐가 살던 때나 지금이나 바깥 세상은 언제나 위험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데도 말이다. 어렵지만 용기를 내는 일도 부모가 할 일이다.
그리고…
책 속에서 그려지는 숲 속의 모습은 손에 잡힐 듯 하다. 나란 사람은 등산과는 거리가 멀기에 '숲'이란 말을 들으면 고작해야 동네 뒷산이나 수목원 속의 모습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지만, 로냐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숲과 강과 그 속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머리 속에서만 만들면 절대 이런 표현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 린드그렌 그 자신이 직접 겪어보고 쓴 글일 거라는 믿음이 든다.
줄거리만 꿰뚫고 나면 더 이상 볼 게 없는 책 말고 여러 갈래로 생각해 볼 것이 많은 책이 좋은 책이라 했던가. 《산적의 딸 로냐》는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내게 '좋은 책'으로 남을 것이다. 로냐가 되어서, 로비스와 마티스가 되어서, 비르크가 되어서, 때로는 산적 떼가 되어서 그때마다 다른 느낌으로 읽어보려 한다.
2002/03/04
어도연 회보 '책 이야기'>
어도연에 다니면서 책을 읽기 시작한 지 만 2년 되었을 때 쓴 글.
난 그때만 해도 글을 쓰면 '제목'을 붙여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산적의 딸 로냐>를 읽고' 이렇게 떠억 써서 원고를 보냈다.
편집부에서 전화가 와서 제목을 정해달라고 하는데 어찌나 난감하던지...
결국 내가 붙이질 못하고 "알아서 좀 붙여 주세요." 이런 비겁한 발언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이 얼마나 황당하고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으셨을까.
(이 글을 보실 일은 없겠지만, ㄱ선생님, 죄송해요... ^^;;)
그래서 이 글에는 따로 제목이 있긴 하지만
여기에는 적지 않는다.
* 표지 출처: yes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