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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메르페스트로 가는 길
마르야레나 렘브케 글(1999) 김영진 옮김(2006) 시공사
아이가 태어나고 보니 남편은 생각했던 것보다 갓난아기를 잘 돌봤다. 우리보다 먼저 결혼한 시누이네 아기를 봐도 살갑게 어르는 법이 없었던 터라 그 모습은 정말이지 뜻밖이었다. 형제들이 모이면 다들 “오빠가 딸내미 태어나더니 변했어!” 놀리곤 했다. 남편은 아이가 한참 클 때까지 도맡아 목욕을 시켰고, 아이는 내가 한 시간을 업어도 말똥말똥하다가 아빠 품에 가면 금세 편하게 잠들었다. 곰살맞게 놀아주는 아빠는 아니었지만, 내가 가끔 일이 있어서 휴일에 집을 비우면 혼자서 아이를 태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곤 했다.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낸 만큼 아이도 아빠를 참 잘 따랐는데, 자라면서 아버지와 제대로 긴 얘기 한 번 나눠본 적 없는 내게는 그런 부녀의 모습이 조금은 낯설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러던 남편이 요즘은 딸내미의 변한 모습에 적응을 못한다. 아이는 사춘기에 접어들어 몸도 마음도 빠르게 변해 가는데, 요 몇 년간 회사일로 바빠서 하숙생처럼 살았던 아빠는 잘 보지 못한 사이에 쑥 자라 버린 아이가 낯선가 보다. 아이도 자기 필요한 얘기만 하고 영 데면데면한 게 예전 같지가 않다. 이러던 참에 아빠와 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이 있다고 해서 《함메르페스트로 가는 길》을 읽게 됐다. 나라는 다르지만 십대 여자아이와 아빠 사이에 일어나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았다.
레나네 가족은 매년 12월 31일이면 납물을 부어 만들어진 모양으로 새해 운세를 점친다. 아빠가 부은 납물이 자동차 모양이 되자, 아빠는 여행을 의미하는 거라며 함메르페스트에 다녀오겠다고 한다. 함메르페스트는 노르웨이 최북단에 있는 도시인데, 오래 전 돌아가신 아빠의 아버지가 ‘언젠가 모든 게 달라지면 함께 가자’고 늘 말하던 ‘지상의 낙원’이다. 결국 식구들 아무도 그곳에 가지 못했고 할아버지 말과는 달리 장미꽃이 만발한 낙원이 아닌 것도 알지만, 할아버지의 꿈은 아빠에게 이어져 언젠가는 꼭 함메르페스트에 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단다.
아빠는 레나에게 함께 여행을 가자고 권한다. 좋아하는 남자아이 이야기로 일기장을 채우고, 자기가 잘못한 일인데도 괜한 자존심 때문에 사과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사춘기 딸을 자연 속으로 데리고 나가 조금이나마 고민을 덜어 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에서다. 물론 그 이유만은 아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 - 레나에게는 비밀인 - 가 있다.
‘아빠가 바라는 그런 딸이 되고 싶어요. 아빠가 저를 자랑스러워하면 좋겠어요. 그리고 설사 제가 못나서 특별히 자랑스러워할 거리가 없더라도 아빠가 저를 사랑하면 좋겠어요. 제가 지금 곁에 있어서 아빠가 기쁘면 좋겠어요.’ (79쪽)
“난 너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게 참 많단다. 그런데 왠지 서둘러야 한다는 느낌이 드는구나. 넌 너무 빨리 커 버려서 이제 곧 내가 보여 주는 것을 보려고도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81쪽)
함메르페스트 여행에 나서며 레나가 마음속으로 생각한 말과 아빠가 딸을 보며 한 말이 어쩐지 가슴 찡하다. 내 마음도 레나 아빠와 다르지 않은데, 커 가는 아이를 보며 뿌듯하기도 하고 가끔은 쓸쓸하기도 한 그 느낌은 부모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혹시 내 아이도 레나 같은 생각을 하려나. 그렇다면 네가 곁에 있어서 기쁘다고 꼭 말해줘야 할 텐데.
아빠와 레나는 함메르페스트로 향하는 도중에 친척집을 방문하기도 하고 길에서 여행 중인 독일 청년을 태워주기도 하며, 아빠 어렸을 적 얘기부터 첫사랑 얘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여행을 떠나기 전 우연히 엄마 아빠의 얘기를 엿들은 레나는 아빠에게 말 못한 비밀이 있고 이번 여행에서 자기에게 그걸 털어놓으려 한다는 걸 알고 내심 언제쯤일까 궁금해 하지만 아빠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다만 아빠의 말에 슬쩍 내비치는 속마음만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자식들은 언제나 부모가 저지른 잘못을 부끄러워하니까.”
“부모님은요? 부모님도 자식들이 저지른 잘못을 부끄러워해요?”
“가끔은. (중략) 하지만 자식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천지가 개벽할 만큼 큰 잘못인 경우가 없지.” (157~158쪽)
두 사람은 도중에 자동차에 이상이 생겨서 함메르페스트까지 채 가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향하게 된다. 돌아오는 길에 오랫동안 들르지 못한 아빠의 고향에 가서 삼촌과 고모들도 만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빠는 레나에게 충격적인 비밀을 털어놓는다.
비록 레나가 그 자리에서 아빠를 다 이해하진 못했어도, 그렇다고 아빠가 걱정하던 것처럼 인간적인 약점을 가진 아빠를 멀리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아빠 대신 한 걸음 먼저 나서는 용감한 모습을 보인다. 레나는 이미 아빠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지 않다. 물어 보고 싶은 게 많지만 아빠가 거기에 대답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묻지 않을 만큼 자랐다. 그리고 아빠는 더 이상 아무런 흠 없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딸에게 슈퍼맨 같은 존재로 남을 수는 없겠지만, 부모의 권위를 내려놓고 자신을 솔직히 드러낸 아빠는 이제부터 딸과 더 깊은 속얘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함께 길동무로 지냈던 시간은 두 사람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 집 아빠와 딸 사이에도 아이가 더 자라 버리기 전에 든든한 다리가 놓여졌으면 좋겠다. 두 사람에게 차표 한 장씩 끊어주고, 머나먼 함메르페스트는 아니더라도 어디 발길 닿는 대로 며칠 다녀오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200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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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 출처: yes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