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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없는 세상
김은희 글, 그림(2008) 책공장더불어
나비가 없는 세상? 고양이 세 마리가 계단에 자리 잡고 있는 표지 그림이 없었다면, ‘훨훨 나는’ 나비가 없는 세상은 어땠을까 한참 생각했을 제목이다. 오랜만에 보는 고양이 만화책이라 반갑게 읽기 시작했는데, 앞부분에 나오는 고양이 이름이 왠지 낯익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 어느 만화 잡지에 연재될 때 두어 번 봤던 기억이 그제야 났다.
만화가인 작가는 소박하면서도 펜선이 살아 있는 그림으로 고양이 세 마리와 16년 동안 지낸 이야기를 풀어낸다. 고양이와 지내는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을 때로는 고양이의 입장에서, 때로는 작가의 입장에서 그려낸 이야기를 읽다 보면 금방이라도 옆에서 그 녀석들의 울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군데군데 작가가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고양이를 보며 적은 단상은 수필집을 읽는 것 같은 느낌도 준다.
처음에는 정이 안 가서 세 번이나 내다버렸지만 그때마다 돌아온 끝에 결국 10년을 함께 산 정 깊은 고양이 신디, 호기심이 가득하고 영리해서 온갖 말썽을 도맡아 피우는 페르캉, 그와 반대로 작은 벌레 한 마리 못 죽이는 겁 많고 평화로운 고양이 추새. 같은 어미(신디)에게서 태어난 형제(페르캉과 추새)면서 세 마리 모두 어쩌면 그렇게 개성이 넘치는지. 하기는 어디 꼭 이 책의 고양이만 그럴까. 사랑스러운 반려 동물/재수 없는 요물, 우리 집 고양이/남의 고양이, 주인 있는 고양이/길고양이 같은 식으로만 나눠서 보는 고양이들이 사실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하나 개성 있는 존재라는 건 조금만 가까이에서 보면 알 수 있는 데 말이다.
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에는 길고양이가 아주 많았다. 오래된 단지여서 화단에 나무가 울창했는데, 놀이터 옆 넓은 화단에는 고양이들이 모여드는 아지트(!)도 있었다. 난 고양이를 싫어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관심도 없어서 그냥 지나치곤 했다. 그러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장바구니를 보고 처량하게 울면서 몰려든 녀석들에게 얼떨결에 빵을 나눠준 이후로 어쩐지 괜히 마음이 쓰여서 며칠에 한 번씩 밥 남은 걸 챙겨서 갖다 주곤 했다. 그러면서 그때까지는 색깔로밖에 구분되지 않았던 고양이들이 하나씩 보이게 됐다. 맨 처음 우리한테 다가온 놈처럼 서슴없이 다가오는 놈이나 애교부리면서 손에서 받아먹기까지 하는 녀석이 있나 하면, 절대로 가까이 오지 않고 멀리 서서 던져주는 먹을거리만 낚아채서 먹는 녀석, 느지막이 나타나서는 나까지 밀어내며 아무 데나 들이미는 녀석, 국수나 라면만 좋아하는 녀석에 또 밥만 죽어라 먹는 녀석, 국물만 할짝거리는 녀석까지……. 조금씩 생김새가 다른 것만큼이나 녀석들은 성격이나 하는 짓도 달랐고, 그만큼 친해지는 재미도 있었다.
작가가 고양이를 기르는 동안 재미있고 기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호기심 왕성한 페르캉은 밖에 나갔다가 사람에게 해코지를 당해서 한쪽 눈을 크게 다친다. 회복하는데 몇 달이나 걸릴 만큼 큰 상처여서 결국은 눈을 못 쓰게 됐지만, 그래도 페르캉은 여전히 남은 한쪽 눈으로 집 주위의 공사장 구경하기를 즐겨하는 씩씩한 고양이로 살아간다. 작가는 페르캉에게 그런 짓을 한 사람이 ‘고양이 한 마리 혼내준 거에 불과하겠지만 그 생명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하는 심정으로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 고양이를 보며 인간이 갖는 동정심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나도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길고양이들이 거리낌 없이 사람들에게 다가갔다가 맞아서 다치거나 심지어는 죽는 일이 종종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절대 가까이 오지 않는 고양이보다는 붙임성 좋은 녀석에게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지만, 그 얘기를 들은 뒤로는 너무 낯가림이 없는 고양이를 보면 오히려 걱정스러웠다. 이유 없이 해코지하는 그 사람들에게는 고양이가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라 그저 ‘재수 없는 물건’ 정도로만 보이는 걸까.
헤어짐과 죽음도 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신디와 추새가 없어져 버리고,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아마도 죽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고양이 두 마리를 생각하며 작가는 더 사랑해 주지 못한 것을 슬퍼하고 고양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마음이 찡해져서 몇 번이고 그 장면을 들춰보곤 했다.
고양이를 통해서 사랑을 배우고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 아이에게 쏟는 애정은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동물을 아끼는 사람들을 보면 쓸데없는 짓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애정에도 등급이 있을까. 한 생명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면서 위안을 받는 그 마음은 결국 통하는 것이 아닐지. 오랜만에 마음에 조용히 와 닿는 책을 만나니 생각도 많아진다.
덧글. 이 책은 100% 재생용지를 사용해서 찍어냈다. 상업지에는 재생용지를 잘 사용하지 않아서 알맞은 용지를 찾기가 힘들었지만, 출판하시는 분이 꼭 재생용지를 사용하겠다는 마음으로 시도를 했단다. 이런 책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2008/09/18
어도연 회보 '내가 읽은 책'>
동물 관련 책만 내는 1인 출판사이자
나와 딸내미가 열렬히 응원하고 있는 출판사.
위의 재생지 관련한 이야기 등은 아래 블로그 가면 자세히 볼 수 있다.
그밖에도 마음을 울리는 글, 생각해 볼 글, 즐거운 글이 많다.
작년 가을에는 18년 동안 함께 한 찡이를 떠나보내며 쓰신 글을 읽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링크/ 책공장더불어 블로그 "동물과 얘기하는 여자"
* 표지 출처: yes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