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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공지영 글(2001) 김영사
만일 혼돈과 공허에 참회의 눈물이 보태진다면, 어쩌면 무언가가 새로이 태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새로운 사실이 태어나기 전에 반드시 영혼의 어두운 밤이 있다"고 조셉 캠벨은 말했다.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이 캄캄해진 후에야 비로소 필요했던 새 인생이 오는 법이라고. (22쪽)
나는 제복이 싫었고 지켜야 할 규율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 남의 마음대로 정해진 게 싫었고 복종해야 하는 게 싫었다. (중략) 아무도 나를 길들일 수 없을 거라고 확신도 하고 있었다. (59쪽)
서양이나 동양이나 기독교를 믿거나 불교를 믿거나 생은 고달파서 골목길 모퉁이마다 돌을 올려가며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138쪽)
신에게 돌아가 항복을 선언하고 내가 자유라고 믿었던 모든 것이 사실은 전혀 자유가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나니 나는 비로소 나 스스로의 강박과 어둠으로부터 서서히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성서의 말씀은 그러므로 진리를 통해 자유를 얻기까지의 그 사이, 각 개인마다 특수하게 다를 미묘한 그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그건 고통일 수도 있고 그건 방황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엎드려 중얼거린 대로 항복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고통을 거치지 않고 방황을 거치지 않고 보다 큰 것에 복종하는 겸허함 없이 얻어지는 자유는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보다 큰 자유, 보다 큰 진리에 순종하는 자만이 가짜 자유와 가짜 진리에 진정으로 불복종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167쪽)
단순하지도 소박하지도 못한 우리 같은 인간들은 숱한 우회로를 통해서만이 신심을 찾아낸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바로 신심의 출발이며 우리들이 믿어야 할 신은 우리들 마음 가운데 있다.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신을 긍정할 수 없다. (193쪽, 헤세)
내 생이 결코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 인생은 나의 것이어야 한다는 이 딜레마. (195쪽)
"난 쉽게 용서하는 사람들 믿지 않아요. 무작정 너그러운 사람도 믿지 않구요. 예수님도 십자가의 형이 다 끝나갈 무렵에야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했잖아요. 십자가의 고통도 거치지 않고 잘도 용서하는 거, 그거 교만이거나 위선이거나 둘 중의 하나 아니에요? 아닌 건 아니라고 먼저 인정하구 그 다음에야 용서를 하든지 이해를 하든지…. 안 그러고 건너뛰면 꼭 후유증을 앓게 되더라구요." (216~217쪽)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도우려 들지 말아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
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 자리를 떠난 별을 보게 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248쪽, 장 루슬로)
2009/01/20
* 표지 출처: yes24